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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한 지 2주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400만을 돌파했습니다. 여기에 특별출연으로 정해인이 연기한 김오랑 소령에 대한 관심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짧은 등장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이로 인해 그가 연기한 실존인물 김오랑 소령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서 그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오진호 소령의 실존인물 김오랑
김오랑 중령은 1944년 경남 김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사정 때문에 또래보다 1년 늦게 증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등학교는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수재였습니다.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합격은 했지만 학비 마련이 어려웠던 그는 대학등록을 포기하고 1965년 육사에 들어갔습니다.
육사 25기로 졸업 후 1970년 베트남 파병을 떠납니다. 이 시기에 아내 백영옥 여사(당시 부산대 간호학과 재학 중)와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가 깊어졌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1972년에 결혼합니다. 1972년 육군 3 사관학교 교관, 1974년 제3공수특전여단 배치를 역임한 후 육군대학 과정을 거치고 소령으로 진급, 특전사로 복귀했습니다.
1979년 3월 특수전사령부 행정장교로 복무하며 정병주 당시 육군 특수전사령관의 비서직을 맡았습니다.
1979년 1212사태
1212 사태 때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은 반란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육군특전사령부 장악이 중요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특전사령관인 정병주는 제거해야 할 대상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당시 김오랑 중령 (당시 소령)의 직잭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당시 제3공수특전여단의 준장이었던 최세창은 특전사령관을 급습하여 정병주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이를 거부했고 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10명의 체포조가 들이닥쳤습니다.
정병주 장관 수하의 다른 장관들은 쿠데타 세력과 결탁했지만 김오랑 소령만이 유일하게 남아 특전사령관을 지켰습니다
이때 정소령이 가진 무기는 권총 한 자루에 불과했고 반란군들은 M16기관총을 들고 진입했습니다. 정소령은 홀로 상관을 지키다 6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전사하고 맙니니다.
이 작전의 선두에 있던 박종규 중령은 사적으로 부부동반 모임을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박종규는 이날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반성했고 죽어서 오랑이를 만나면 사죄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건 발발 후 김중령의 시신을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했었는데 동료장교들의 항의로 인해 1980년 2월 28일 국립 현중원에 이장되었습니다.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선 아내 백영옥 여사
김오랑 소령의 부모님은 막내아들의 허망한 죽음을 비통해하시다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 여사는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백여사는 남편의 명예회복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습니다. 그녀는 '김오랑 소령에 대한 1계급 특진, 서훈을 요구하는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으며 국방부는 1990년에 중령진급을 추서 했습니다..
백여사는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과 쿠데타에 가담했던 장교들을 상대로 소해배상 소송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송이 보류되었고 백여사는 이듬해 1991년 6월 자신이 머물던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당시 그녀의 죽음을 실족사라고 결론을 지었습니. 그러나 허리높이의 난간이 있는 건물에서 실족사할 가능성이 얼나 될까요? 아직도 그날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참군인 김오랑추모사업회
백여사가 생전에 바라던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한 요구는 중령진급과 무공훈장 추서였습니다. 그녀의 노력으로 중령진급은 이루어졌으나 무공훈장은 수여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뜻을 '참군인 김오랑추진사업회'가 이어받았습니다.
김중령에 대한 무공훈장 추서 및 주모결의안이 17,18대 국회에 연이어 발의되었지만 통과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대 국회에도 같은 내용을 다시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무공훈장 추서 충분한 자격이 되지 않는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여야 의원을 설득해서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2014년 무공훈장대신 보국훈장을 김중령에게 추서 한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참군인 김오랑추모사업회'는 경남 김해시에 김중령의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서울의 봄'이란 영화로 1212 사태가 다시 재조명되고 있고 김오랑 중령의 참된 군인정신이 귀감을 사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주고 떠난 영화의 한 장면 때문에 진정한 군인이었던 김중령을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 기본 정보 실존 등장인물 평점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과 함께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개봉한 지 일주일도 안되어 관객이 200만 명을 넘어섰고 300만 명을 육박하고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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